伝道の時に知らなければいけない日本人の死生観

私は以前「福音の立体的骨格を伝えるには?」という記事を書き、日本における伝道の課題と、従来の「四つの法則」に代表される言葉による伝道以上の働きが必要であることを訴えました。根気よく人々に付き合っていくことが、日本の人たちへの伝道では必要なのですが、最近、次のエッセイ集に出会って、目から鱗が落ちた気分になっています。

神とか霊とか占いとか

伝道また弟子作りをしている時に、多くの人がいろいろな課題にぶち当たります。思い出すのは、津波被災地で、ある姉妹が、罪と死について、そしてキリストの身代わりの死について話したところ、多くの死者が回りにいるにも関わらず、被災者の方から「死ぬということについては、あまり考え出すと気がおかしくなる。」という返答が帰ってきました。また、つい先日も、近しい人に伝道したところ、「理屈では分かるが、あまり今は考えたくない。」という反応が返ってきたとある姉妹が話していました。

私も神道の熱心な信者に、神の義と、罪による死、キリストの贖い、そして永遠の命までを話しましたが、「そんな深刻なことを日頃から考えていたら、大変ではないのか。もっと楽しく生きよう。」ということをおっしゃっていました。ちなみに彼女は津波や原発の被災者を助けるボランティアの方であり、やはり「死」という現実に直面せねばならぬのに、この問題を避け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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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와 일본선교

만일 이 기사를 읽는 한국 분이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무시하셔도 됩니다. 아니면, 일본 친구나 동료가 있을 때는 더움이 될지도 모르는데 기본적으로는 믿는 사람 대상으로 쓸 글입니다. 내영이 아주 도전적인 것 같을 것인데 하나님의 권속안에 일어난 과재 하나이기 때문에 용기를 내서 기록하겠습니다.

저는 선교사이고 이제 동경에서 교회를 개척하는 목사입니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고 일본선교로 먼저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언어를 공부하다가 다른 나라에서 5년동안 이상 봉사 활동을 했습니다. 한국사람 그리고 조선족 친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동양에 대해 하나님께서 큰 계획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하나입니다.

뉴스에 나온 독도 그리고 중국과 있는 영토문제 때문에 요즘 일본 성도들이 큰 무서움이 마음속에 들었습니다. 뉴스에서는 일본정부가 강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면 일반 사람들도 그렇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대부분 관심이 없고 역사적인 지식도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과 중국에서 나온 반일행동들을 영상으로 보니까 일본 사람들도 일반 사람들이 그렇다고 오해합니다. 평소에 서로 교재나 사귐이 있는 사람이야 그런 일이 있어도 특별하게 여기지 않은데, 한류 유행에 익숙해진 일본사람들은 평소에는 상냥한 한국 사람들이 어째서 갑자기 표변된냐고 당황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특히 일본사람앞에 독도가 우리땅이라고 하면 안된다고 하겠습니다. 이유가 몇게 있습니다.

1. 일본 선교에게 큰 방해가 됨

먼저 성경 말씀을 나눠 드리겠습니다.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롬14장15-19절)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고전9장19-22절)

영적으로 말하면 독도가 우리땅이란 주장이 아무리 옳다 해도 그 주장 때문에 선교의 대상인 일본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한국인라면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아무리 한국이 일본에 종이었다, 일본이 사과 해야 한다 해도 기독교인들의 인구가 1%이하인 일본이 20-30%있는 한국에게는 역시 선교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본을 사랑하신다 믿는다면 복음 전파를 위해 자기 것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여기 계시는 장기 선교사님들이 위에 있는 것들을 제가 안 말해도 늘 이해하시고 실행하십니다. 요즘 쓰나미 피해지에 한국 단기선교 팀이 가셨는데 역사적인 문제나 방사능 문제를 넘어가서 영혼 구원을 위해 예순님의 명령을 순존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너무 아름다웠습니다!

2. 신학적인 문제

영토는 하나님께서 각 나라에 주시는 선물입니다. 국가의 경계선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사17장26절) 그래서 그 나라의 지도자와 국민들이 영토를 지켜야 할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적인 은사입니다. 자연적인 은사는 다시 말하면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로 구원을 받아들인자들에게 사실 영토가 예비됩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5-5)

온유한 사람이 예수님의 복음을 영접하고 자기 죄를 께달았고 마음이 겸손해진 사람의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라들를 기업으로 나눠 주시는 약속이 성경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국적이 천국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권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이 천국에서 다시 이 땅에 오시면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 된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땅을 다스립니다. 그 때는 일본, 한국, 상관 없이 성도들의 땅이 될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에서 국적을 한국이나 일본이나 갖고 있기 때문에 영토에 대한 관심도 저절로 생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대하는 사람에게는 이 기대가 헐씬 더 크기 때문에 비교하면 두 나라사이에 있는 영토문제가 아주 작다고 생각합니다. 그 것보다 예수님이 다시 왕들의 왕으로 오시고 나라들에게 심판을 주실 때 믿지 않는 한국사람이 독도커녕 한반도도 상속하지 못해 지억에 들어가야 하는 진리를 잘 기억해야 합니다(마25장31-46절). 가장 한국을 사랑하는 수단이 한국 사람한테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3. 영적인 문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3장28절)

하나라고 하는 것이 민족의 차이가 없어지는 말이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차이가 그리수도인이 되도 계숙 있는 거처럼, 저는 일본사람이고 여러분은 한국사람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그 편지에서 유대주의자를 대하고 그리수도인의 정체성을 분명히 가리켰습니다. 유대인이 이방인들에게 할례나 유대인만이 하는 의식을 지켜야 복을 얻겠다고 하니까 그 것이 저주를 받을 이질한 복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이 다른 편지에서 그런 자랑수러운 유대성이 해라고 불렀습니다. (빌3장7절) 왜냐면 유대인이 갖고 있는 율법이 이방인을 방해하는 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독도 문제를 하도 말하고 인본인 형제 자매들과 있는 교재를 일어 버리면 똑같은 문제가 생깁니다. 여러분은 한국 그리수도인(Korean Christian)이 되고 싶어요? 아니면 기독교 한국주의자 (Christian Koreanizer)가 되고 싶어요? 정체성이 어느 편에 있습니까?

예수님주의 열두 제자안에서 세리 마태가 있고 열심당 시몬도 있었습니다. 세리는 로마의 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로마가 억압을 주고 세금도 많이 내야 했습니다. 유대인인 세리가 로마를 위해 일하고 게다가 자기 것으로 일부를 훔칠 때가 일상이었습니다. 열심당이 유대 민족주의자이었습니다. 군사적인 수단으로 로마를 쓰러뜨려야 메시아가 오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열심당이 배신자를 보면 칼로 죽일 때가 많았습니다.

어째서 시몬과 마태가 같이 살 수 있었어요? 예수님이 가운데 계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제자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삼아 자기를 버리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고 예수님으로 마음이 가득하기 때문에 서러의 있는 차이가 너무 작게 보입니다.

이 것이 자기 특징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적인 은사는 거듭난 사람이야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해서 빛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한인 교회로 영적인 원리를 많이 배웠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음식 먹을 때 서러 나눠 주는 습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적으로 말하면 음식은 교재를 표시합니다.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안에 서러가 하나가 뒨 신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한국 민족에 이미 있는 공동체의식이 거듭난 사람들 사이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4. 마지막날의 황상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마태24장7절)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개9장9-10절)

마지막날에 이 땅에서는 민족과 국가간에 싸움이 심해집니다. 반면에 모든 족속과 언어와 백성과 나라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천국에서 찬양을 드리는 일도 생깁니다. 나라사이에 있는 갈등이 인간 죄때문에 심하게 되는 반면에 그 흐름을 무시하고 대항하는 것처럼 다른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예수님이 흘리신 비로 하나가 되는, 널라운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중동에서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대부흥이 일어났는데 믿게 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황상을 보고 완전한 회심을 했습니다.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였던 그리스도인이 이제 유대인인데 예수님을 믿게 된 형제와 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미움이 사라지고 대신에 사랑이 넘친 것입니다. 정치가도 외교관도 학자들도 활동가도 하지 못했던 화목이 그리스도안에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종요한 것은 대화보다 더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가운데 자기를 넣고 나서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하야 하는 일

밑에 있는 영상을 보세요. 그 젊은 인본 사람이 믿는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올바른 행동을 했습니다. 작년에 일본에서 텔레비 방송국앞에 한류를 반대하는 데모가 있었는데 한국에서도 그 뉴스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 때 용기를 내서 한 것입니다.

하물며 그리스도인들이 서러사이에 이런 시대라서 할 수 있는 교재와 연합이 많이 있는 것이 아니예요? 저는 올해 1월초에 있었던 동아시아 청녕회에 일부분 참석했습니다. 강의도 하나 했습니다. 중국, 한국, 그리고 일본인들이 서로 교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동아시아 기독청년대회
내년도 2월에 제주도에서 하겠습니다!

世界一評判の良い国 ― 日本 その3

(「その2」からの続き)

「外を見る」ことは「愛すること」

BBCの調査の話に戻しますと、日本人がしなければいけないことの一つは「感謝する」ことがありましたが、もう一つは「外を見る」ことです。日本人は内省が好きなのですが、内省してばかりいるので、周りの人に貢献すべきことができなくなっている、という問題があります。私がカンセリングをしていた人が、一度、次のようなことを仰っていました。「自分の内にある問題に取り組んでいたばかりに、それが思い煩いとなって、数多くの意義ある活動をする機会を見失っていた。」内村鑑三も、回心の経験をしたのは、学長による次の諭しでした。

自らの内なる罪に日夜、懊悩(おうのう)する内村に、シーリーはある日、やさしく次のように諭した。「鑑三、君は君の衷(うち)のみを見るから可(いけ)ない。君は君の外を見なければいけない。何故己に省みることを止めて十字架の上に君の罪を贖(あがな)い給いしイエスを仰ぎ瞻(み)ないのか。君の為す所は、子供が植木を鉢に植えて其(その)成長を確定(たしか)めんと欲して、毎日其根を抜いて見るのと同然である。何故に之を神と日光とに委ね奉り、安心して君の成長を待たぬのか」と。
worldtimes.co.jp/special/mida/md001001.htm

内を見ることによって、神ご自身を見つめることを忘れています。そして神ご自身を見つめることを忘れているので、神が抱いておられる計画を見る時間が削がれています。神がこの全世界を愛しておられて、それで御子をお与えになったのに、自分のこと、自分の周りのこと、自分の国のことだけを見ていて、それで世界で何が起こっているか、そこに神がどのような情熱を注いでおられるのかを見失っていることがあるのです。

そして、自分を見つめることは美徳に見えます。しかし、「あの人に迷惑をかけてしまったのではないか」という心の苦悩は、ある意味でその人を愛していないことと等しいです。心の責めを神の赦しによって取り除いてもらったというところから出発し、それで相手がどのような状態でいるのかと、キリストの目で見つめることのできる愛が与えられるのです。

日本人には極めて多くの可能性があります。ちょっと笑えない冗談がありますが、日中韓の世界における影響を、こう言っています。「日本は世界中に会社を持っている。中国は世界中に中華料理店を持っている。韓国は世界中に教会を持っている。」日本の世界における会社の影響は甚大です。日本人はこれを否定的に捉える人がいるのですが、海外進出をしているときの日本企業の評価は現地で極めて高いのです。現地法人を作るときに、上の人は日本人ですが、他は現地採用なのに対して、韓国はすべて韓国から持ち込んで、下働きを現地人にさせるという方法を取っています。それでも韓国も世界の評価は上がっていますが、長い年月をかけて日本はそれをし続けていますから、その底力が肯定的評価につながっているのです。

そして私が中東に行った時は、イスラエル人からもアラブ人からも好意的に見られる経験をしました。イスラエル人はなぜ日本にあこがれるかと言いますと、「反ユダヤ主義フリー」の世界を見るからです。もちろんマスコミや言論界では反ユダヤ主義は現存していますが、実際のユダヤ人に対しては極めて中庸です。私はある正統派ユダヤ教徒の人に、「君たちには、誇るべき東条がいたではないか。」といわれて、非常にとまどいました!彼らにとっては、その時代、敵はドイツであり、そして帰還を阻んだ英国でした。そして長い歴史をユダヤ人の流血で塗っているヨーロッパ大陸から離れています。同時にアラブ人も、日本企業による極めてすぐれた投資と企業誘致を見ていますから、アラブ諸国への多大な貢献がありますから、日本のことを悪く思っていません。

もし日本人がイスラエルへ、また周辺アラブ諸国に宣教へ行ったら、どんなによいことだろうかと思います。他の国の人々ができないことがわんさとあります!

けれども、どうしても日本は内向きなのです。私の知り合いの韓国の宣教師の方々は、共通の悩みを持っています。日本の教会の人たちに、共同の宣教の働きをしたいと願っても、振り向いてくれないという悩みです。日本で留学している中国人の兄弟にもこう言われました。「私が通っている教会の人たちは、とくに私が中国人であることに興味を示してくれなかった。」私は返答しました、「差別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はなく、ただ内向きなんですよ。」

私も今年の元旦、「東アジアキリスト青年大会」で説教の奉仕にあずかりましたが、主催者も私も積極的に日本のキリスト者に声をかけましたが、結局、私の教会の人が二人いっただけで、他に誰もいませんでした!日中韓のキリスト者の集まりであるはずが、中韓だけになったのです。(しかも、日本の東京中心部において!)先に挙げた中国人の兄弟は、はるばる九州から東京まで来られたのに・・・。

韓国の宣教師たちは、たとえ反日感情という韓国人共通の感情を持っていたとしても、世界宣教に熱心な韓国ですから、日本がいかに可能性の秘めた国であるかを重々知っています。世界を見てそして日本を見たら、BBCの調査が示している通りなのです。なのに、日本人本人が自分たちばかり見て、反省ばかりしているのです!私は内村鑑三の学長と同じ言葉をもって諭させていただきます。

「あなたは、子供が植木を鉢に植えてその成長を確めようと願って、毎日その根を抜いているのと同じことをしていますよ。なぜ自分を神と天とに委ねきり、安心して自分の成長を待たないのですか?」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界を愛された。・・・」神はあなたを愛しておられます。そして、世界を愛しておられます。この神を愛し、礼拝するときに、自ずと自分自身も世界に対する愛を抱くはずです。神はこんなに大きな方なのです!天に教会が引き上げられたら、そこには日本語を話す、日本人の集まりではないのです!あらゆる国語、民族、国々がキリストの血潮という理由だけで贖われた人々が集まって、同じ小羊をほめたたえています(黙示5:9‐10)。

今のカルバリーチャペルに足りないもの - 宣教の視点から

最近行なわれた、日本カルバリーチャペル・カンファレンスはとても祝福されたものでした。そこで少し、前進した、進歩したと感じられるものがありました。それは、講師がすべて日本国内のカルバリーチャペルの牧者であったこと、そして、従来の英語主体・日本語訳付きから、日本語主体・英訳付きに動いたことです。

1965年に始まったカルバリーチャペル・コスタメサから始まった主の働きは、今や、何千もの教会を国内と海外へと広がっています。私は、この群れが大好きで、この群れの一つになれていることを誇りに持っていますが、同時に、これから長い時間をかけて次世代に伝えていく課題もあります。

それを一言でいうならば「宣教」であり、「宣教地における福音と教会の定着」であります。カルバリーチャペルは、60-70年代に米国内で起こった「ヒッピー運動」の若者たちがキリストに立ち上がったという「イエス革命」と呼ばれる中で多くの指導者が出てきました。既存の伝統的な教会に、新しい世代の礼拝賛美スタイル、また若い世代を受け入れる愛と寛容を持っていました。

しかし、米国内ですでに起こっていることですが、「南カリフォルニアの郊外地域に教会が多数」あり、「他の地域に伝播していく」ためには、大きな一歩を踏まなければいけないということです。ハンティントン・ビーチのサーファーに代表されるような、極めて開放的で、形式に拘らない雰囲気が多くのカルバリーチャペルに特徴的なのですが、元々のコスタメサの教会、そして牧者チャック・スミス本人は、ヒッピーを「受け入れた」のであって、ご自身は保守的な米国人です。朝の礼拝では、牧者や案内係にはスーツを着用するようにさせています。カルバリーチャペルの運動は、「ラフで開放的」というのが原則ではなく、「異なる世代や種類の人々を受け入れる」という愛が土台でした。(参考記事

実際に、日本においてカルバリーチャペルが多いのは、「沖縄」と「東京西部」です。つまり、南カルフォルニアのビーチの文化と沖縄の島にある恵みの文化が合っていますし、東京も中心部ではなく郊外に点在します。同じ流れを感じます。

そしてその文化の延長なのでしょうか、あるいは、現代のアメリカ人の特徴なのでしょうか、「言語の習得」という海外宣教にはなくてはならないものが、ないがしろにされてきました。私たちの近しい知人の宣教師は、OMFに所属しておられますが、彼が日本や他の宣教地で奉仕しているアメリカ人が英語のみを使って活動している話を聞いて、目を点にしています。「OMFでは、アメリカ人も現地の言葉を流暢に話していますよ。」とのこと。ご本人は自分にとっての第二言語で、説教と祈りを始めとする全ての牧会をしています。

カルバリーに限らず、なぜ今のアメリカ人の多くが言語習得をなかなかできないのだろうか?と私は悩みます。戦後直後に来られた、今は老齢の宣教師の多くが流暢な日本語を話せるのに・・・。私がギリシヤ語の最初の授業で、「アルファベットを覚えるのが明日までの宿題です」と言われたので覚えたのですが、暗記した人は一握りでした。後に、宿題をこなす私を仕舞いに、仲間の学生が「天才」と呼ぶようになりました!

ですから、あまりプレッシャーを感じさせてはいけないと思いつつ、小出しに「日本語」を強調しています。

そしてもう一つは、言語以外の文化的要素です。聖書の原則を抽出して、それを現地の文化や習慣、社会に当てはめていく作業がどうしても必要です。例えば日本では、「葬儀」と言えば仏式であり、その時にキリスト者としてどのように対処すればよいのか、ということを考えなければいけません。

ところが、「福音の言葉を伝えておけば良い」という雰囲気があります。けれども、教会というのは生活全般の中に位置し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わけで、世において起こるあらゆる面において世の光、地の塩になることを、教会に来ている人々は願っているわけです。

例えば、今年は米国大統領選があります。共和党候補にモルモン教徒のロムニー氏が出てくることは必至です。米国内では、キリスト者がモルモン教徒を大統領として選んでよいのかどうかが議論されています。それだけ「キリスト者と政治」についてよく考えているわけです。ならば、「宣教地にいる現地キリスト者も同じなのだ」と考えなければいけないのですが、そこまでの発想までにはなりません。イエス様は、「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と命じられただけでなく、「弟子としなさい」とも命じられたのです。全生活において、キリスト者として生きる指針を与える義務が宣教者にはあるのです。

私の知り合いの牧師さんは、聖書学校の学生たち(多くがアメリカ人)にこう教えたそうです。「宣教師と現地の人との関係は、イラク駐在米軍と現地イラク人の関係と似ている。米軍が撤退した後も、現地イラク人はそこで生活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だ。」宣教師が、教会生活そのものさえ知らずに、くっちゃべって去っていくのではいけないのです。残されていく人々が確かに自立して生きていくことができるように、手助けしていかねばならぬのです。

The Great Omission”という著書を書いた、日本でも宣教経験のあるロバートソン・マクルキンさんが、一度、カルバリーの宣教会議のゲスト・スピーカーだったのですが、彼は基本的に短期宣教を信じていませんでした。その役割はあるだろうけれども、聖書的には長期宣教だと断言していました。そして宣教者は、ヨハネ1章14節にある、「ことばは肉となって、私たちの間に住まわれた」とあるように、現地の人々の只中で生きることによって、自分のうちに現われるキリストによって人々に伝える、というものであると教えてくださいました。それから、今日の世界宣教界では、”Incarnation Mission(受肉宣教)”という単語が使われていることを後で知りました。

今も私は宣教の働きをするときの支柱になっている御言葉です。この前、他の国の兄弟姉妹の教会に、私たちの教会の仲間が訪問する機会があって、その一人から「明石さんは、その人たちに溶け込みすぎていて、どこにいるのか分からなくなった。」というようなお言葉をいただきました。私にとってはものすごい褒め言葉で、とても嬉しかったです。ある宣教師は、「宣教は、聖書を片手にして、あとは言語とガッツ(肝っ玉)だ」と言いました。言語習得にしても、文化を知ることについても、根性さえあればできる、ということです。

カルバリーチャペルは、まだまだ発展途上の段階にいますが、それでも少しずつ前進していることを感謝しています。私自身、未熟な面がたくさんあって成長しなければいけないと感じています。ウクライナでは、カルバリーチャペルは完全に現地化されている(つまり、現地の教会が現地の人々によって完全に営まれている)と聞きます。日本でも、少しずつその方向に進んでいることを感謝しています。

「喜びの分かち合い」を妨げるもの

「その主人は彼に言った。『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あなたは、わずかな物に忠実だったから、私はあなたにたくさんの物を任せよう。主人の喜びをともに喜んでくれ。』(マタイ25:21)」

「私たちの主イエスが再び来られるとき、御前で私たちの望み、喜び、誇りの冠となるのはだれでしょう。あなたがたではありませんか。(1テサロニケ2:19)」

「すると、どういうことになりますか。つまり、見せかけであろうとも、真実であろうとも、あらゆるしかたで、キリストが宣べ伝えられているのであって、このことを私は喜んでいます。そうです、今からも喜ぶことでしょう。(ピリピ1:18)」

「ダビデは言った。「兄弟たちよ。主が私たちに賜わった物を、そのようにしてはならない。主が私たちを守り、私たちを襲った略奪隊を私たちの手に渡されたのだ。だれが、このことについて、あなたがたの言うことを聞くだろうか。戦いに下って行った者への分け前も、荷物のそばにとどまっていた者への分け前も同じだ。共に同じく分け合わなければならない。」(1サムエル30:23-24)」

主の御霊が働かれるところには、喜びがあります。そして、それは主の豊かな恵みによるものであり、関わっている全ての人に分かち合わざるを得ない性質のものです。良い知らせを受けて、それを自分だけに押し込めておくことは罰を受けてしまうだろうという思いが生じて、他の人々に分け与えます。だれも、あふれるばかりの主の恵みを占有することはできないのです。

私たちは海外宣教の経験から、二つの原則を見ます。一つは、「神はご自分の御霊で働かれる時、その妨げとなる既成のものを時に壊される。」ということです。もう一つは、「ぺっちゃんこになったところに、神は灰から花を咲かせるように、復活の命を吹き込まれる。」ということであります。(参照記事:「私たちはよみがえります」)ちょうど、神が、人々が地に広がる、地に満ちるようにするために、人間の力と知恵で築き上げたバベルの塔を、言葉をばらばらにすることによって無理やり散らされたように、私たちの肉の力で築きあげたものをばらばらにされることがあります。

東日本大震災において、神の御霊が働かれました。私自身東北出身の人間として話しますが、「みちのく」(道の奥)という言葉があるように、東北の人々は「こもる」傾向があります。内向きであり、外から来るものを受け付けない傾向を持っています。ですから、地元の教会も共に働くという機会は少なかったし、また開拓伝道は実に難しいところです。けれども地震と津波によって、真にキリストにあって助け合う空気が教会間に生まれ、そして地元の方々が新しく来たボランティアに対して暖かく迎える空気が出来上がりました。それは、私たちの経験した海外宣教に、より近づいたものになりました。

形や組織、儀礼というものは取っ払われ、機動性のみが重視されました。ある地元の牧師さんは、「地元の人々は、初めに来てくれた二つのグループの人々を知っています。自衛隊とクリスチャンたちです。」当事者たちが自分たちに何が起こっているかを把握することができないほど、主の働きが先行し、それに追いつくようにして、自然発生的に様々な教会が被災地に突き進んでいったのです。

そして、伝道、弟子訓練、開拓伝道というのはプログラムではありません。生身の体を持つ人間相手の働きです。人と人とのぶつかりあいによって進んでいきます。宣教において必要なのは、主が肉体を取られて人々の間に住まわれたように、その現場の中に一つになることです。そして東北という村社会が色濃いところですから、共同体というものの中にある原則を、ちょうど潜水して息を止めるように、その中でじっくりと観察していかなければいけません。プログラムを押し付けることはできず、中にいて、そこに働いておられる主に自分自身が出会うのです。そこから、外から与えられる福音ではなく、内から湧き上がる福音、キリスト者らを通して広がっていく生きた福音が必要であります。

しかし宣教において必ず起こるのが、人間的な組織化です。例えば、「この伝道対象地域は、だれの管轄か。」という縄張り意識。「この救われた魂は、どこの教会に属するのか。」という、これまた縄張り意識。既存のものがぺっちゃんこにされ、だれがどこの教会に行くのかなど、どうでもよかったものを、いや、誰かがどこかの教会につながれば、皆で一つになり、大声で喜びを分かち合うことができるものを、そのような意識に縛られて、形を壊しながら働かれた神の御霊を結果的に打ち消しています。

アメリカで実際に起こった話です。ある牧師はずっとある国に短期宣教旅行に行っていました。現地の人々とのつながりができ、御言葉を教える多くの機会が与えられていました。ところが、その教会の他の部門を担当している人が、「あなたの通っている宣教地域は、アメリカの●×教会の牧師が管轄になったから、その人に許可を得てから行かなければいけない。」その牧師は唖然としました。それで電話し、聞いてみました。その、宣教地域の管轄を任された牧師とも実は知り合いの仲でしたが、彼はこう答えました。「私に許可なんか取る必要はありませんよ。」

このことを分かち合ってくださった牧師は、「これは残念ながら、有名な宣教団体でも多かれ少なかれ起こっていることです。」と言って、他の例も挙げてくださいました。いずれにしても、私たちが人間である以上、いつでも起こりうることだということです。

そして組織を作ってしまうと、恐いのは、その組織を維持することに多くの気力を使うことが可能になってしまう、ということです。その組織を運営していくことこそが、主に仕えているのだと勘違いしてしまうことです。これはもはや、ミニストリー(=主への奉仕)ではありません。(参照:「ミニストリーの基本」(原稿 ・ 音声))

そして、その宣教の現地の話に戻ると、十年ぐらい経った今、その管轄の牧師が実際には管轄しているのではなく、地元の教会の牧師たちが共に協力し合い、自立して動いていこうという機運が生まれています。そして、そこには豊かな平安と喜びが留まっています。再び御霊は、人が形あるものを作り上げようとしているのを壊し、人々の内側から御霊が働かれ、ご自分のわざを成し遂げようとしておられるのです。

「御霊で始まったあなたがたが、いま肉によって完成されるというのですか。(ガラテヤ3:3)」

「聖霊によって始められたのですから、聖霊によって続けましょう!(「カルバリーチャペルの特徴」チャック・スミス著 第九章「聖霊によって始まった」65頁)

福音の立体的骨格を伝えるには? その2

その1からの続き)

行ないによって

そして伝道の強力な武器は「良い行ない」です。神が愛であるのと口で言うのと、困っている人に実際に必要にかなう物を分け与えるのとでは全然違います。後者によって神が愛であることを伝えるほうが極めて効果的です。東北震災の被災地において、大勢の人がキリストを実感できました。「なぜクリスチャンのボランティアは、見返りを期待せずに喜んで働いているのだろうか?既存の神道や仏教の人々より、圧倒的な差でなぜ教会が動いているのか?」という問いかけが、現地では多くなされています。実際に目で見えるものによって、目に見えない神のご性質をおぼろげに知ることができたのです。

そして、このように生活の証しによって、実際に伝道集会において、福音の言葉を聞いて信じる人が起こされています。その場でただ福音の言葉を聞いたのでは決して知ることのなかった、輪郭のある証言を与えられていたからです。

弟子作りによって

そして私は、弟子作りそのものが伝道になると思っています。つまり、時間をいっしょに過ごし、聖書の言葉をじっくり、時間をかけて教えていくことです。イエス様はマタイ伝では、弟子たちに「弟子にしなさい」という命令を与えられました。マルコ伝では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と命じられましたが、弟子にしていくことは、単に福音を口で伝えること以上の過程が必要です。

旧約の時代から、神は人に対して時間をかけて接しておられました。アブラハムが神を知るのは、その何十年もかけた人生においてでした。ヤコブも体験も一足飛びではありません。ヨセフも、兄が自分を売ったことについての神の救いの計画を知るには、時間がかかりました。モーセも神に召されるまでは八十年かかっていますし、誰一人として四つの福音の冊子にある、即効的な神との出会いはしていないのです。

多神教を信じる者に対する伝道は本当に時間を要しました。ダニエルのことを思います。ネブカデネザルは、ダニエルの忠実な証しによって、晩年に天におられる神、主を認めるに至りました(ダニエル4章)。彼の発言には段階があります。初めはダニエルの神をほめたたえました。けれども、4章では自分自身の神としてほめたたえています。

そしてイエス様は、弟子たちと三年間、いっしょに時間を過ごされました。寝食を共にして、そして教えを弟子たちは聞きました。イエスの行なわれるわざを間近で見ました。それでもイエス様の本当のところについては悟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全貌はご復活後に明らかにされるのです。

「骨格」が与えられるのは、やはり聖書にある神の教えを伝えながら、じっくりと時間を共に過ごすことにある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もちろん、救いは信仰を持つことによって瞬時に与えられます。御霊による新生が徐々に、漸次的に与えられ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新生しているか、いないかのどちらかです。けれども、それが必ずしも、四つの法則をいっしょに見ていったことによって、その人の人生に明らかにされるわけではないのです。クリスチャンの家庭に育った子弟が、自分の信仰が明らかになるまで時間がかかることがよくあるように、時間がかかって良いと思っています。大事なのは、信じたと告白する前から時間を共に過ごし、告白した後も同じように時間を共に過ごし、一貫した、変わらぬキリストの姿を見せていくことであります。

福音の立体的骨格を伝えるには? その1

米国から戻ってきたばかりの時の逆カルチャー・ショック

私たちが米国にいて、日本から訪ねて来られた人々に直球の伝道をしていたことがあります。ホームステイで短期に来られた人々に、そのまま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の意味を教え、そして決断もお薦めするというようなことを行なっていました。かなり考え込んでくださっていましたが、それで信じた人はいませんでした。けれども、それでも伝えられたということで満足でした。

ところが日本に戻ってきて、その葛藤は深刻になりました。「四つの法則」に代表されるような福音の提示だけが果たして福音伝道であるのかどうか、ということです。特に、アメリカ人家庭でイエス様を信じたという日本人が帰国すれば、そのほとんどは初めから信じていない、ということが多かったのを見て、「イエスご自身を、立体的に輪郭をもって伝えられていないのではないか?」と疑問を持つようになりました。

文化習慣的な要素があることは確かです。米国のレストランでは自分の好きなメニューを瞬時で選んでウェイトレスに伝える姿を見ると、論理的に考え、選択をすることが日常で行なわれている欧米人には良いのかもしれないが、例えば、「阿片戦争」という映画で、英国人がYesかNoかと中国人官吏に迫っていたときに、腕を込んで考え込んでいる姿に表れているように、二者択一の決断がなかなかできない要素が多分にある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した。

そして人間関係が重要です。東洋人は相手を尊ぶがゆえに「はい」と答える傾向があります。相手が語っている内容に同意するのではなく、その人を重んじているのです。

けれども、それだけが要素ではないと感じています。一番大きな要素は、やはり重厚なユダヤ・キリスト教の歴史を欧米は持っ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イースター(復活祭)についても、例えば一般雑誌に「イエスは果たして復活したのか?」というようなことが特集記事になる程であり、読まなくても家庭に聖書が一冊あるほどなので、四つの法則で最終的な決断を勧めても問題ないところまで来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感じています。

けれども、「四つの法則」は誰もが学ぶべき基本的知識です。伝道をするときに、この法則を念頭に入れておくのとそうでないのとでは歴然とした違いがあります。そこには、神の救いのご計画が実に見事にコンパクトにまとめられています。そして、最近米国では伝道者レイ・コンフォートが提唱し、実践している十戒を使った伝道方法も、注目に値します。反響を呼んだ”180“というビデオは、伝道する時に「考えていない人に考えさせる」という触発を与えるのは良いことであることを教えられました。

神の与えておられる接点

今、私が落ち着いている伝道するときの立場は、「ユダヤ人にはユダヤ人のように、律法を持たぬ人にはそのように」という使徒パウロの姿勢です(1コリント9:19-23)。そしてイエス様がニコデモとサマリヤの女に対して行なわれた伝道です。

私は全ての人が神からの知識を持っていると信じています。自然界に神の創造が現れているのはもちろんのこと、そうでなくてもその人が持っている興味、これまで歩んできた人生、自分の今の考えなどによって、そこに神が介在しておられると信じています。

イエス様は、聖書に精通しているニコデモに対しては聖書から話され、井戸に水を汲みに来たサマリヤの女に対しては「水」から永遠の命を語られました。新しく生まれることを話したイエス様は、サマリヤの女に対しては「霊とまことをもって礼拝する」と言われて、巧みに言葉を変えて同じ真理を伝えておられます。ペテロも、イスラエル人に対して、「ぶどう酒に酔っているだけだ」という反応を取り上げて、そこから聖書を語り始めました。語る福音宣教者が、聞く者の中にある言葉や関心事、知識を土俵として、それを導入として語り始めるのです。

パウロの宣教を通して、数多くの人がイエス様を信じていきましたが、けれども彼はユダヤ人の会堂に初めに行って伝道しました。そして異邦人でも改宗者や神を敬う人々に向かって語りました。すでに聖書の知識を持っている人々、創造の神を求道している人に語ったので、それで信仰に至りました。反面、自分が願わぬ形で、テモテとシラスを待っていた時、独りで伝道したアテネでは、「知られざる神」という言葉から天地創造の神、そしてイエスの復活、そして再臨とその後の裁きを宣べ伝えましたが、多くの人はあざ笑うだけでした(使徒17章)。しかし、ここでも彼は、どこかで接点を見出して、そこからイエス様を語ろうと努力したのです。

私は以前、神道の信者に伝道したことがあります。その方は私が教会の者だと分かるとかえって興味を持って話しかけてこられました。その時に私が行ったのは、神道の葬式について質問したことです。目的は、相手とどのような接点があるのだろうか、相手が何に興味を抱いているのか、どのような価値観を持っているのだろうか、などを見極めることでした。-「自分が分からなかったら、素直に聞いてみる」ということは大事だと思います。- そして、ある程度の神道の信仰体系をお伺いして理解してから、それから永遠の命、そして罪と死について話したのだと思い出します。

また、死刑制度について話していた方がいました。自分の家族が殺されたら、自分は決してその人を赦すことはできない、そいつが与えた同じ苦しみをもって、苦しみを与えたいという感情が沸くだろう、ということを仰っていた人がいます。ここで、「それは罪だ。赦さないといけない。」と説教するのは極めて間違っていると私は思いました。なぜなら彼女はまだキリストを知らないからです。むしろ、その人の心に「報復の神」が啓示されていると思いました。私はこう答えました。「全くその通りです。苦しみを与えた者には、それにふさわしい報いを受けるべきだと思います。けれども私たち信仰者は、それを神がしてくださることを知っています。神が復讐してくださることを知っているので、正しい裁きが人間によって行なわれなくとも、神が行ってくださるという希望によって支えられているのです。要は、神を信じることが大事です。」と答えたかと思います。

パウロは、「すべての人に、すべてのものとなりました。それは、何とかして、幾人かでも救うためです。(1コリント9:22)」と言いました。自分の語る言葉を振りかざすのではなく、むしろ相手の僕となることによって、相手の土俵から福音の真理を語り始めます。相手が求める説明に対して弁明するような形で語るのです(1ペテロ3:15)。

そのためには、私たちは神だけでなく、神のお造りなさった人にも関心を示さねばならないでしょう。それには労力が伴います。自分が相手に教えるのではなく、初めに相手を知り、学んでいく必要があります。その人のところに届く宣教者とならなければいけません。その人の言語、その人の社会、その人の文化があります。そこに入ることによって、私たちが「イエス」というお名前を発するときに、相手にとって単なる言葉あるいは音で終わるのではなく、人格のある存在として伝わっていく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

その2に続く)

「反対」の中にある福音宣教(2) - 過激なキリスト教への招き

(「「反対」の中にある福音宣教(1) - 金日成とキリスト教」の続き)

なぜここまで説明したのかと言いますと、これは福音宣教に深く関わることだからです。主は不思議にも、悪魔をご自分の栄光のために用いられました。神に反逆する悪魔とその手下どもが行なうことを、そのままご自分の計画の中に取り込まれます。最大の御業はもちろん十字架です。神の子を殺す、という最大の犯罪を、全人類の贖いという究極の、永遠の御心とされたのです。

キリスト者に強硬に反対し、迫害した使徒パウロは、「とげのついた棒をけることは、あなたにとって痛いことだ。」とイエス様から言われました(使徒26:14)。「とげのついた棒」とは牛のくびきにつける突き棒であり、若い牛がくびきをいやがって足蹴りをすると、突き棒で痛くなるようにしているものです。サウロは、ステパノの証言を聞いていました。それが突き棒になっていました。そして彼はついに、復活のイエスに出会って突くのを止め、降伏したのです。

数年前のカルバリーチャペル宣教会議にて、Jay Smithと言う人が来ました。私は彼の宣教方法とその生き様に感動しました。ロンドンの広場で、イスラム教の過激派と論戦をすることによって福音を伝えています。彼はこういいます。「イスラム過激派に福音を伝えるには、同じように過激なキリスト教で応じるべき。(”The only way to deal with this radical form of Islam,” he asserts, “is with an equally radical form of Christianity.”)」彼は宣教会議でこう話しました、「私は過激派の彼らが大好きです。私たちの聖書を持ってきて、たくさん下線を引き、ポストイットを貼り、矛盾だと感じていることを論じてくるのです。私が彼らのその熱意に敬意を表します。」

彼はキリスト教の神学校でイスラム教を専攻し、イスラム教の教義については精通していました。けれども「文化」を知らなかった、と言います。イスラムの国やムスリムの共同体にいて、長年かけてこのことを学びました。そして過激派ムスリムをキリストに導くには、気に触るようなことを避けるのではなく、むしろ反対に、自分が信じていることに強い確信をもって語らなければ伝わらない、と確信するに至りました。(以上、記事Unapologetic Apologistから)

私たちはこれが必要なのです。第一に、「伝道対象相手を知ること」です。そのためには言語はもちろんのこと、その文化や生活習慣、社会体制、その他諸々のものを体得し、体感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イエス様は神の身分であられたにも関わらず、肉体を取られて、人々の間に住まわれました(ヨハネ1:14)。この方こそが宣教の先駆者であり模範であられます。そして第二に、御言葉に精通していることです。そして本当にそれを信じていることです。ある無神論者がこう言いました。

俺は今までずっと、伝道しない人なんて尊敬しないと言ってきた。全然尊敬できないね。もしあんたが、天国や地獄があると信じているなら、また、地獄に行ったり、永遠のいのちを持てなくなったりすることがあると、本当に信じているなら、いかなる場合でも伝道するはずだろう。伝道すると社会ではやりにくくなるとか、相手は「俺に構わないで、信仰は自分だけのものにしてくれよ」なんて言う無神論者だとかいった理由で、伝道しないのなら、それはおかしい。永遠のいのちがあることを知っていながら、それを伝えないのは、その人を憎んでいるのと同じことだ。どれくらいの憎しみを持てば、伝えないでおれるのかな。例えば、トラックが前方から走って来て君をひきそうになる。俺なら、君がひかれる前にタックルして、君を助けるよ。伝道するかどうかは、トラックにひかれそうになっている人を助けるかどうかよりも、もっと重大なことだろう。
Penn Jillette gets a gift of a Bible(Youtube)
ブログ記事「福音って「いいね!」 福音を「シェアする」」から)

福音伝道は、伝道プログラムを学習するような単なる技法ではなく、体と体がぶつかり合うような熱意なのです。

(後記:エジプト人のコプト神父ザカリア・ボトロス氏も同じような、イスラム教徒への直球宣教を行なっています。日本語による報告記事はこちらから。)

私たちはみな宣教者

では、今の私たちはどうすればよいのか?「ジーザス・フリーク(イエス気違い)」になってください。キリストの愛でいっぱいに満たされ、この方をいつもほめたたえ、この方に霊をもって熱心に仕えてください。

次に、御言葉をしっかり学んでください。御言葉を教えるのは牧師がすることという丸投げはいけないのです。キリストの弟子になり、牧者が教えていることを今度は自分自身が教え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する、ということを目標としてください。時には神学校や聖書学校が必要になることもあるかもしれませんが、それよりも、自分が御言葉を十分に教えられる奉仕者とならなければいけないのだ、ということを大前提に持っていてください。

そして次に、伝道対象である人々の中に住んでください。「自分」というものを捨てて、虚心になりその人たちの生き方や考え方を知って、自分自身もそれを身に付けてください。そうすれば、心からその人たちのことを愛せるようになります。他の人にはさげすむようなこと、嫌悪するようなことも、自分自身は愛着心を持つことができます。あるジャングル奥地の宣教師はこう言いました。「私たちは最高に幸せです。子供たちも最高の教育を受けています。昆虫が好きなのですが、ここは生きた博物館だからです。」

パウロはギリシヤ人にはギリシヤ人のようになり、ユダヤ人にはユダヤ人のようになりましたが、その根底にあるのは「全ての人の奴隷になる」ということでした(1コリント9:19-23)。それは迎合ではなく、自分を低めることです。自分を低めるときに、周りの人は始めて自分のうちにキリストを見る事ができるようになります。

「反対」の中にある福音宣教(1) - 金日成とキリスト教

ある人のツイッター記事に、「北朝鮮の金日成の母親はクリスチャンで、祖父は牧師だったとWikipediaに書かれているが、これって本当なのか」という記事がありました。

確かに、今の北朝鮮体制を見ればとうてい、その創始者の母がクリスチャン、そしてキリスト教家系であったことを想像するのは難しいでしょう。けれども、韓国の人々や朝鮮半島のキリスト教をある程度知っている人には、良く知られている歴史です。その母「康盤石(カン・パンソク)」のウィキペディア記事の一部を紹介したいと思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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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涯
朝鮮平安南道大同郡でキリスト教長老会牧師の康敦煜の二女として誕生し、使徒「ペテロ(岩)」の名に因み、女性の名としては珍しい「盤石」という名がつけられた。本人もキリスト教徒であったという。1908年、17歳の時に金亨稷と結婚し、1912年に成柱(後の金日成)を生んだ。1919年に夫が祖国光復会事件に巻き込まれると、1920年に、金日成を連れて南満洲(中国東北部)に移住した。金亨稷の死後は息子の金日成を女手一つで育てたが、1932年に40歳で死去した。

家族
父:康敦煜(カン・ドンウク、강돈욱)(1871年2月3日 – 1943年11月14日)プロテスタント長老派の牧師
母:(ウィ・ドンシン、위돈신)
兄:康晋錫(カン・ジンソク、강진석)(1890年1月19日 – 1942年11月12日)長老派の牧師、白山武士団を組織
兄:康用錫(カン・ヨンソク、강용석)
弟:(カン・リョンソク、강룡석)
再従叔:康良煜(カン・リャンウク、강량욱)(1904年12月7日 – 1983年1月9日)長老派の牧師、北朝鮮臨時人民委員会委員長(日本の中央大学を卒業)
良煜の妻:(ソン・ソクジョン、송석정)平安南道肅川郡の出身
良煜の二男:康永燮(カン・ヨンソプ)朝鮮基督教連盟の中央委員長、共和国最高人民会議の常任委員会委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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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ちらの記事にも同じことが書かれています。
キリスト教を弾圧した金日成も手術前に祈り - 父母は敬虔なクリスチャンだったが徹底した宗教弾圧

名前はの「パンソク」は、「我が岩なる主」というような言い回しの「岩」として朝鮮語聖書では数多く出て来ますので、韓国人であれば名前だけ聞いて「この人クリスチャンだよね」と容易に想像できます。彼女は、単なるちょっと教会に通っていたクリスチャンではなく、極めて熱心な信者であったと言われています。

かつて私は、「今一番、世界が見ないもの その1」の記事の中で、マスコミが描き出す国々の姿が一面的であることを書きました。日本の北朝鮮報道は反体制のものが多く、興味深いことに拉致事件を契機に日本国民に反北朝鮮意識が浸透したように思われます。私自身は、北朝鮮国内で起こっている惨状はもっともっと報道すべきだと思っており、「北朝鮮人権侵害問題啓発週間」の記事に書きましたように、日本の対北朝鮮経済制裁は全面的に支持しています。

けれども同時に、その一面だけ伝えているのでは偏っています。北朝鮮現政権打倒を強硬に推し進める脱北者でさえ、それは政治や人権意識から来る主張であり、決して郷土愛を失っているわけではなく、むしろ戻りたいと願っており(「映画「クロッシング」日本公開」参照)、日本の反北朝鮮報道にも驚いている程で、ある脱北者は「そんなに酷くないよ」と言いました。朝鮮中央放送ばかりが日本のお茶の間に流れていますから、「マンセー」と両手を挙げている人々が北朝鮮人だという印象を抱いていますが、彼らにも和やかな家庭生活があって、文化・社会・スポーツがあり、私たちと同じように時事についても考えているのです。

北朝鮮はOpen Doorsではここ何年も、世界で最も信仰の自由が蹂躙されている世界一の国として登場しますから、キリスト教とは程遠いと感じられるかもしれませんが、いやむしろ近いからこそ蹂躙しているというほうが正確です。

朝鮮半島の福音宣教の本拠地は、かつて平壌にありました。

韓国リバイバルのルーツは1907年の平壌リバイバルにあります。今の北朝鮮の平壌で大リバイバルが起こりました。でも1910年から始まった日本による植民地支配で、神社参拝をさせられるようになり、リバイバルの火は消えていきました。その後、1950年に朝鮮戦争が起きて、北のクリスチャンたちが大勢、南に逃げてきました。そして彼らが韓国全土に教会をつくったのです。朝鮮戦争休戦(1953年)後には、多くの家族が北と南で分断されましたから、神様に叫ぶしかない状態が生まれ、そこから韓国のリバイバルが始まっていったのです。
私は1953年の生まれですから、物心ついたときには既にリバイバルが始まっていました。国のあちこちに祈祷院がつくられ、リバイバル聖会が開かれれば、月曜日夜から土曜日朝まで、一日3回の聖会がずっと続きました。激しい涙の祈りがあり、何人ものリバイバリストが、ものすごい情熱で真っ直ぐに御言葉を語っていました。
(リバイバル新聞記事より引用「韓国と日本が一つになって世界宣教を とりなし手 文惠仁さん」)

このように、霊的復興が朝鮮半島で起こっている中で日本が植民地支配をしたために、日帝に対抗する独立運動がキリスト教にも反響しました(参照ウィキペディア記事「韓国のキリスト教 近代」)。神社参拝の強要というのがその大きな要因となったのです。その独立運動の中で共産主義革命が入り込んで、それで金日成という人物が出てきたのです。

その後、朝鮮は光復(朝鮮では日本の敗戦日をこう呼びます)を迎えました。けれども、日本もそうでしたが既に冷戦は始まっていました。日本の中には共産党が戦時中にすでに入り込んでおり、反共を国是とする日本は彼らを主要な対象として取り締まっていました。日本列島でさえソ連と米国の間で分断されるとも言われていたのですが、朝鮮半島はまさに自由・民主主義陣営と共産主義陣営との間で国内分断が起こっていたのです。

元々、共産主義はユダヤ人かつキリスト教徒であった両親から生まれたマルクスが創始者です。そのユートピア社会はまさに神の国の幻と酷似しており、けれども進化論思想の影響もあり、「人は善」そして「無神論」に基づく、まさに異端ならず「異型」を作り上げました。マルクス自身、十代の時はキリストを愛しているという文章を残している程で、共通項が数多くあるのです。

そこで朝鮮戦争が勃発しました。朝鮮半島北部にいる信者は一斉に南に逃げました。現在、韓国にある伝統的な大きな教会は北朝鮮をルーツとしています。けれどももちろんそこにいた信者たちも数多くおり、現在、そこには地下教会があると言われています。

これが北朝鮮の金日成体制とキリスト教のつながりです。ある人は、金日成が「父なる神」、金正日が「子なるキリスト」そして主体思想が「聖霊」という、キリスト教の三位一体を投影していると言っていました。頭を挿げ替えれば、そのままキリストの体になるような側面を持っています。

大韓航空機爆破犯の元死刑囚、金賢姫さんはこう言っています。

「『あなたが信奉する共産主義を捨てて信仰をもつのは非常に大変と思いますが、どうして信じる決心ができたのですか』と質問した時、金賢姫さんはこう答えてくれました。『それは簡単です。頭では金日成を捨て、イエス・キリストを受け入れたのです。首から下は同じです』と。その回答は明快でした」(信仰者として出会えて夢のよう--横田早紀江さん 金賢姫さんと会見

ですから、北朝鮮の方々は暖かいです、純粋で素直です。そして共同体意識をとても大切にします。朝鮮学校も「政治」として日本では議論されていますが、それは少し残念なことです。そこには暖かい家族のような雰囲気があると言われています。金正日が死亡したときも、極めて冷静で、平素と何ら変わらない学校風景だったと言われています。そして日本は韓国人のための韓国学校もあるのですが、圧倒的に、歴史的に在日朝鮮人の学校は言語教育と民族教育においてしっかりしています。「在日朝鮮語」という本来の韓国語や朝鮮語と異なるジャンルも確立している程です。ですから総連を政治的に見るだけでは可愛そうです。そこには生身の私たちと同じ感情と思考を持たれている、そしてキリスト者にとってはキリストが死なれた程の、神に愛された人々がいるのです。

韓国にあるカルト教会

先ほど引用したリバイバル新聞記事には、インタビューに答えている韓国の信者の方がこう韓国キリスト教会の課題を述べています。

苦難の歴史の中で、神様の前に叫ぶ祈りは与えられたのですが、それが個人的な懇願にとどまってしまったように思います。これは、キリスト教以前に韓国に存在したシャーマニズム的宗教の影響があり、祈る対象が変わっただけだとの見方もできます。神様の御心に従って生きるというよりも、現世利益を求め、人生がうまくいくために神様を求める信仰です。そして、熱心さがそのままその人の信仰の評価になってしまうという傾向があって、神様に切実に熱望すれば祝福が臨むという、自分の努力で神様の祝福を獲得できるという考えが広まりました。聖書は、神の主権が最も大切だと言っていますよね。

韓国には統一協会が一番有名ですが、異端やカルトがものすごく沢山あります。今、プロテスタント教会が減退している中で、異端やカルトへの大移動が起こっているとも言われています。その根底にあるのが、上にあるような懸念です。そのような素地を半島にはあるので、金日成体制は純粋なスターリン式社会主義ではなく、独特な宗教性が多分に含まれています。そして朝鮮王朝から続く独裁体制も色濃く残っているでしょう。

(「「反対」の中にある福音宣教(2) - 過激なキリスト教への招き」に続く)

jesusnetjapan

先ほど、すばらしい福音宣教サイトを見つけました。

KnowingGod.jp

非常にシンプルかつ、はっきりと福音を伝えています。イエス様だけを伝えているのが良いですね。そして同じ運営者が作成した震災に関連する希望のメッセージのサイトも充実しています。

HopeForLiving.net

そのどちらのサイトにも登場する、資生堂キャンペーンモデルだったヨハンナさんの証しが心に沁みました。一度お会いしたことがあるのですが、彼女自身についてはあまり知らなかったのですが、「こういう証しを持っていたのだ」と関心しました。

Ioanna Sillavan – A Story of Hope (modeling) from Gottkennen.ch on Vimeo.

モデルというのは自分の身体そのものが「商品」であり、自分を取り囲む有名で影響力のある人々にある空しさを感じたという内容の部分を聞いて、次の黙示録18章の箇所を思い出しました。

商品とは、金、銀、宝石、真珠、麻布、紫布、絹、緋布、香木、さまざまの象牙細工、高価な木や銅や鉄や大理石で造ったあらゆる種類の器具、また、肉桂、香料、香、香油、乳香、ぶどう酒、オリーブ油、麦粉、麦、牛、羊、それに馬、車、奴隷、また人のいのち(直訳=肉体)です。(12-13節)」
ともしびの光は、もうおまえのうちに輝かなくなる。花婿、花嫁の声も、もうおまえのうちに聞かれなくなる。なぜなら、おまえの商人たちは地上の力ある者どもで、すべての国々の民がおまえの魔術にだまされていたからだ。(23節)」

人の身体でさえ商品とさせる世界、そしてそれはビジネスの中で作られた世界であり、そうした商業主義は実体がないものに実体があるように見せかける「魔術」であると思ったのです。

この二つのサイトを運営している人のブログがこちらです。

jesusnetjapan

WhyJesus.netというサイトの準備もしているそうで、求道者に歴史上のイエスを質問に答える形で説明していくようにしていくものだそうです。楽しみです。